

<대도시의 사랑법>, 도시의 틈에서 피어난 사랑의 형태들
도시라는 말에는 늘 무언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는 뉘앙스가 따라붙는다. 회색 빛 건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전광판에 끊임없이 바뀌는 숫자들, 그리고 그 속에 잠긴 수많은 이야기들. <대도시의 사랑법>은 그런 대도시의 틈 사이, 사람들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사랑과 외로움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여준다.
박상영 작가 특유의 유머와 감정의 진폭은, 때로는 우리가 꾹 눌러놓은 '진짜 감정'을 툭 하고 건드린다. 그리고 그게 너무 절묘해서, 한 줄을 읽다가 웃었다가, 다음 줄에선 이상하게도 코끝이 시큰해진다. 참 웃기지도, 슬프지도 않게 마음을 묘하게 건드리는 책.
재희
"네가 너인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어?"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 한 켠이 내려 앉았다. 이토록 당연해야 할 말이, 왜 이렇게 흔하지 않은지.
성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 특히 대도시라는 공간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일지 책을 덮고 나서야 조금 짐작하게 된다.
우럭한 점, 우주의 맛
"그럼 오늘부터 저를 우럭이라고 부르세요. 쫄깃하게."
"아니요, 광어라고 부르겠습니다. 속이 다 보이거든요."
영이와 '그 형' 의 이야기에서는 그 슬픈 '짐작'들이 고스란이 녹아 있다. 운동권의 잔재를 안고 살아가는 '그 형'은 아직도 경찰감청을 두려워하면서 아이폰을 쓴다. 미제는 싫다더니 아이폰. 말도 안되게 유치하고 말도안되게 현실적이다. 영이에게 상처를 주는 '그 형'은 단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두려움으로부터 상대를 지키기 위해 '가해자'가 되어버린 인물이다. 성정체성은 받아들이면서도, 밖으로 드러나는 건 두려워하는 모순. 그 지독한 모순을 이 소설은 기가 막히게 짚어낸다. 그를 통해 작가는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인물상을 만들어낸다. 누군가는 구시대의 찌꺼기라며 비웃겠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 그 어중간한 과거에 발목 잡힌 채 살아가고 있지 않던가. 고작 스무 해 전의 이야기 인데도 '라떼' 가 되어버린 감성. 어쩌면 우리는 다들 어느 정도 '그 형' 인지도 모른다.
대도시의 사랑법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건「규호」편이었다. 아, 이 인물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게 귀엽고, 정이 간다. 주인공 영이가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규호에게 털어놓았을 때, 규호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건넨 말이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규호의 태도를 보여주며,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신뢰와 사랑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규호는 겉으로 보면 담담하고 차분한 인물이지만, 그 내면에는 따뜻함과 깊은 수용력이 있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고, 무엇보다 영이를 조건없이 사랑했던 인물.
예전에 남편과 이야기하다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만약에 우리 아들이 '엄마, 나 사실 게이야' 라고 하면 어떻게 할거야?" 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이민 갈거야"
그 말은 농담도 과장도 섞여있지 않은 진심이었다. 지금 이 사회에서 '성소수자' 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지 알 것 같기에, 그리고 그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에, 나는 아이에게 그런 세상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그 생각은, <대도시의 사랑법> 을 읽고 나서도 티끌만큼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사랑에는 형태가 없고, 사랑의 방식은 다양하다는 사실을 이 책은 유려하게, 그러나 아주 현실적으로 보여주었으니까.
나는 스스로를 '굉장히 깨어 있는 사람' 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들은 농담처럼 나를 꼰대 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이만큼 와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을 향해, 여전히 나와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가십거리 삼는 걸 보면, 씁쓸하기 짝이없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단지 성소수자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며, '상처'에 대한 기록이며, 무엇보다도 '사랑'이라는 묵직한 감정을 다루는 아주 정직한 글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어떻게 사랑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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